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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화가 이중섭 작품 200여점 한자리에
 
염지은 기자   기사입력  2016/06/05 [20:48]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6월3일부터 10월3일까지  

이중섭의 삶 자취 따라 '황소' 등 유화, 은지화·엽서화·편지화 등 200여 점 전시

   
▲ 이중섭, 두 아이, 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8.5 x 15.5, 개인소장

전국아파트신문 염지은기자= 천재 화가 이중섭(1916-56)의 탄생 100주년, 작고 60주년을 기념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전시가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중섭의 작품과 자료를 총망라한 전시회를 처음으로 마련했다. 6월3일부터 10월3일까지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덕수궁관에서 연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이중섭 전시회를 여는 것은 처음으로 덕수궁관 전관을 할애했다.

전시회에는 '황소', '길 떠나는 가족', '욕지도 풍경' 등 이중섭의 대표적인 유화 60여 점을 비롯해 드로잉과 은지화, 엽서화, 편지화 등 작품 200여 점과 자료 100여 점이 총망라됐다.

미국 뉴욕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중섭의 은지화 3점, 제주 이중섭미술관에 소장된 원화 16점 등 60곳의 소장처로부터 작품이 대여됐다.

전시는 식민, 해방, 전쟁을 관통하며 정처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중섭이 거쳐 간 '시공간'을 따라 전개된다. 상대적으로 작품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부산·제주도 피란시기'의 작품이 첫 전시실에 전시되며 전쟁 직후 최고 절정기 작품을 남겼던 '통영 시대', 가족을 그리워하며 수많은 편지와 가족그림을 남긴 '서울 시대', 경제적 궁핍과 절망 속에서 정신적인 고통에 휩싸였던 '대구와 서울(정릉) 시대'의 작품들이 순차적으로 4곳으로 나눠 전시된다.

한국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한 천재적인 예술가의 '꿈과 좌절'의 경로를 되짚어 보며,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과 예술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 이중섭, 황소, 1953-54, 종이에 유채, 32.3x49.5, 개인소장

이중섭은 일제 강점기인 1916년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평양, 정주, 도쿄에서 학업을 쌓았다.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화가 활동을 시작했고, 1943년 함경남도 원산으로 돌아온 후 해방을 맞았다.

한국전쟁으로 제주도, 부산 등지에서 피란생활을 했고 전쟁 직후에는 통영, 서울, 대구 등지를 전전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다 1956년 41세의 나이로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이중섭은 식민지, 전쟁, 분단 등으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를 관통하면서도 끈질기게 '예술가'로서의 삶을 고집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의 상징인 '소'를 서슴없이 그렸다. 한없이 암울한 현실을 자조하는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가난한 피란시절에도 가족과 행복한 시절을 보내며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가 하면 전쟁 후에는 강렬한 의지와 자신감으로 힘찬 황소 작품들을 쏟아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표현에 충실한 '정직한 화공'이 되고자 했다. 한국의 전통미감이 발현된 '민족의 화가'가 되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일본인 아내와 자녀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사기로 인한 빚에 시달렸고 경제적 생활고 속에서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 질환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결국 쓸쓸하고 애잔한 작품들을 뒤로 한 채 1956년 9월6일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서울 망우리공원에 묘소와 묘비를 마련했다. 그의 작품은 그의 사후인 1970년대에 들어서야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전시 출품 작품은 디지털 스캔 작업 등을 통해 전시장에서 영상으로도 구현될 예정이다. 오디오 가이드 제작에는 영화배우 이정재 씨가 참여하며 수익금은 전액 기부될 예정이다.

   
▲ 이중섭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54.11월경, 종이에 펜, 채색, 26.5 x 21.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무언의 대화 '엽서화'…'은지화'에 새긴 영혼

민족의 상징 '소' 연작…사랑의 편린 '편지화'

이중섭은 일본 유학기 도쿄의 문화학원에서 후에 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를 후배로 처음 만났고 졸업 후에도1943년까지 도쿄에 머무르며 마사코에게 수많은 '그림엽서'를 보냈다. 한 면에는 가득 그림을 그리고, 다른 면에는 오로지 주소만 적혀 있으며, 글은 전혀 없는 '무언의 엽서'들이다.

총 90여점의 엽서화가 알려져 있으며 그 중 일부가 전시된다.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그림에서 점차 자신감과 투지가 불타는 그림으로 발전하는 엽서화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두 연인의 사랑이 점차 진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금속공예의 은입사 기법을 연상시키는 '은지화'는 이중섭이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새기거나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게 돼 매력적인 드로잉이 완성된다.

이중섭은 상당히 오랜 기간 약 300점의 은지화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제주도 서귀포 시절 행복했던 가족들의 모습을 추억하는 것에서부터, 비극적인 사회 상황과 자신의 처참한 현실을 암시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장면들이 예리한 칼로 새겨져 있다.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전쟁 직후 1954년 6월경까지는 월남한 공예가 유강열(1920-76)의 주선으로 통영 나전칠기전습소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의욕적인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을 그린 유화작품이나 유명한 '소' 연작들이 이 때 제작됐다. 이중섭의 개인전이 최초로 열리기도 했다.

   
▲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54, 종이에 유채, 29.5 x 64.5, 개인소장.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후 이중섭은 여러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돌며 가족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언제든 곧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다정다감한 편지를 많이 썼다.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을 염려하며, 그림을 곁들인 사랑스러운 편지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1955년 중반 이후 점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면서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내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중섭이 보낸 편지들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약 70통, 150매에 있으며 일부가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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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6/05 [20:48]   ⓒ 전국아파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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